형수와 엄마를 지켰다

형수와 엄마를 지켰다

시베리아 0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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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새마을 사업을 한답시고 많은 지역에서 주택 개량 사업을 추진하여 초가지붕이야 거의 사라졌지만 내가 살던 곳에는 가장 보기 좋은 집이 슬레이트 지붕이 얹혀진 그런 집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최근에 한 번 다녀갔을 때는 고작 3집이 남아 있었고 나머지 집들은 마치 흉가처럼 방치가 된 상태였습니다.

제가 거기서 살 당시에는 2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기에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이며 젖가락이 몇 모인지 대충 알았으며 누구네 집에 멸 철 몇 칠이 누구의 제사며 생인인지도 알았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18살에 불과하던 저희 집에는 저만 남자이지 나머지 두 명은 여자였고 하나는 형수고 나머지 여자는 엄마였다.

형수와 엄마는 둘 다 과부였다.

엄마의 경우 아버지가 병사하여 된 과부였다면 형수는 형님이 월남전에 참전을 하였다가 죽음으로서 생과부가 된 것이다.

1970년이면 월남전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다.

미군의 육군 병력을 본국으로 돌아갔고 미군은 공군과 만만한 홍어 좆같은 존재였던 대한민국의 무고한 군인들이 참전 용사라는 미명하에 미군의 총알받이가 되어 쓰러져 가던 그런 시기였고 거기에 우리 형님도 포함이 되었던 것이었다.

솔직히 내 친구들 중에도 형님이나 아빠가 월남전에서 사망을 하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아니면 고엽제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는 거의 같은 말이 나온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월남에 갔고 그래서 거기서 사망 내지는 부상 아니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입을 비틀어졌다고 하더라도 말은 바로 하고 넘어가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가 한 몸 휘생을 해 가며 월남전에 파병을 자원 한 것이 아니라 가난에서 탈피하기 위한 몸부림의 하나로 월남전에 자원을 한 것이며 국가 입장으로 볼 때 베트남을 공산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미군을 돕기 위하여 파병을 한 것이 아니라 선량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총알받이로 만들어 외화벌이를 시켰다고 난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우리 형님도 말이다.

그런 형수는 겨우 24살로 아이는 하나 있었지만 형님이 월남에서 죽고 전사 통지서를 받자 혼자 사시던 사돈 할머니께서(현수의 친정 엄마)외손자를 당분간 자기가 키우겠다면 데리고 갔다.

물론 사돈 할머니는 딸인 형수에게 개가를 권하였고 우리 엄마도 개가를 하라고 하였으나 형수는 아들을 시가에 맡기고 개가를 할 수가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사돈 할머니아 우리 엄마가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몇 마지기 안 되는 땅을 가꿀 능력을 기진 남자라고는 겨우 18살 먹은 나뿐인 터라 가장 아닌 가장 노릇을 하여야만 하였다.

그런데 우리 엄마를 넘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고 또 형수를 넘보는 남자도 있었다.

엄마의 경우 마을 이장이자 나에게는 사촌 아제가 되는 사람이었고 우리 형수를 넘보는 놈은 나의 친구이기도 한 병석이라는 놈이었다.

그럼 먼저 두 남자들이 우리 엄마하고 형수에게 치근덕거리든 모습을 먼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겠다.

허름한 슬레이트집의 구조는 엉망이었다.

더욱이 집 뒤에 있는 허름한 문은 여름이면 바람을 소통시켜주는 중요한 일을 하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안방을 훔쳐보기에 아주 좋은 것이었다.

집의 구조를 잠시 소개를 한다며 가운데에 안방이 있고 안방을 기준으로 오른 쪽에 내가 사용하는 작은 방이 안방보다 조금 더 뒤쪽으로 길게 나와 있었고 내 방 앞에는 마루로 통하는 문이 있었고 방 바로 앞에는 족은 광이 하나 있었으며 안방 왼쪽에는 앞으로 툭 튀어나온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방은 형수님이 사용을 하는 방이었고 형수님 방과 달린 뒤쪽에는 부엌이 있었다.

그리고 내 방에는 뒤 안을 볼 수 있는 작은 봉창문과 함께 안방 뒷문이 달린 쪽으로도 작은 봉창 문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형수님의 방에서는 나의 방처럼 마루로 나오는 문이 있는 반면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부엌문만 열고 나오면 바로 들어 갈 수가 있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문은 형님이 결혼을 하고 형수님이 부엌에서 음식을 할 경우에 시어머니인 우리 엄마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살며시 방으로 들어가 형님의 요구를(요구가 무엇인지는 아시겠죠.)들어주고 몰래 나올 수도 있게 만든 그런 용도로 쓰이는 문이었다.(나중에 형수 입을 통하여 알게 되었음)

그런데 문제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안방 뒷문이 달린 쪽으로도 작은 봉창 문으로 뭔가가 어른거리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장이자 사촌 아제가 바로 그 어른거리는 그림자의 주인공이었다.

사촌아제는 안방의 뒤에 있는 허름한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엄마를 불렀고 그러면 엄마는 훤한 대낮이고 금방까지도 밥을 먹고 있었지만 마치 낮잠을 자는 것처럼 코를 골며 자는 시늉을 하기 일쑤였다.

그런 행동은 약관에 불과하였다.

요즘이야 집집마다 샤워시설이 안 된 집이 없고 집에서 목욕탕이 그리 멀지 않은 것에 대부분 있지만(시골 구석에고 마을 공동 목욕탕이 있어서 요일을 정하여 두고 같이 목욕을 한다고 함)당시의 열악한 삶은 부엌이나 광에 세숫대야 같은 것을 놓고 바커스에 예비 물을 준비하여 두고 씻는 것이 고작이거나 여름 같은 경우 남의 이목을 피하여 개울에서 씻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사촌아제는 우리 부엌이나 내 방 앞에 딸린 광에서 물소리만 나기만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 같이 나타나서 훔쳐보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옛날 화장실은 거름이(퇴비) 있고 땅을 파서 드럼통을 묻고는 그 위에 널빤지 두 장은 얹어놓은 화장실로서 들어가는 문이 없는 것도 허다하고 있다고 해 봐야 낡은 덕석을 잘라서 입구를 가렸지만 화장실 안을 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안을 볼 수 있는 열악한 구조였는데 엄마가 화장실에만 가면 사촌아제는 훔쳐보기 일쑤였고 밭을 갈고 있는 엄마를 보면 거의 필수적으로 오촌 아제가 옆에서 엄마의 옆구리를 찌르는 척 하면서 엄마의 젖가슴에 손을 대는 것이 다반사였다.

문제는 그런 사촌아제의 행동을 다시 훔쳐보는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

사촌아제의 엄마에 대한 찝쩍거림은 나로 하여금 성적이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었고 흥분을 하게 만들었으며 급기야 엄마는 나의 성적인 욕망을 가지게 만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또 엄마를 보면 어딘지 모르게 사촌아자의 그런 행동을 유발하도록 하는 듯 같은 행동을 하였다.

그래서 내 생각에 남의 이목만 피한다면 언제든지 엄마가 사촌아제에게 가랑이를 벌려줄 소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게 된다고 가정을 하면 나에게도 벌려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접어들자 난 사촌아제에 비하여 훨씬 유리한 고지에 있다고 판단을 하였다.

엄마를 사촌아제로부터 구하는 길은 내가 먼저 엄마를 나의 여자로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고 난 실행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엄마 몸에 올라가 좆을 엄마의 내가 나왔던 보지구멍에 박아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래도 직접 낳은 아들은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엄마는 아주 연약한 존재이며 그리고 도덕적으로 고민을 할 것 같기에 천천히 실행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먼저 우리 엄마의 잠자리 모습을 이야기 해 보겠다.

요즘이야 늙든 젊든 간에 파자마나 아니면 적어도 트레이닝바지를 입고 자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70년대 당시의 열악한 사정은 소위 왜놈들이 한국민족을 손쉽게 부려먹고 열심히 일만 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몸빼가(일 바지)작업복 겸 잠옷 노릇을 하였다.

거기다가 요즘이야 고무줄의 질도 좋아져 옷을 삶고 빨아도 고무줄이 그렇게 늘어나거나 상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당시의 고무줄은 따뜻한 물이 지나가기만 하여도 늘어나서 줄어들지를 않아 고무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 하였다.

그러다 보니 허리춤은 노끈이나 새끼로 매어주어야 하였고 발목의 고무줄은 있으나 마나라 발목 천을 조금만 들면 사루마다가(팬티) 훤히 보일 정도였다.

거기다가 요즘처럼 질 좋은 천으로 만든 사루마다 같으면 몸에 짝 달라붙어서 사루마다 안이 안 보이지만 당시에 사루마다는 거의 광목으로 만들었고 그 광목의 질도 형편없어 몇 번만 빨면 손톱만 스쳐도 찢어지는 그런 수준이었다.

거기다가 여자들의 사루마다는 더 잘 찢어졌다.

요즘이야 소변을 보고 바로 휴지로 보지에 묻은 오줌의 잔류물을 닦아내는 것이 필수이지만 당시에는 대변을 보고도 신문지나 소위 말하는 똥 종이를 사용하였기에 그런 종이로 보지를 닦았다가는 보지가 좆에 의하여 문드러지기 전에 그런 종이에 의하여 문드러지고 말 것 같기에 소변을 하고 닦는 일은 엄두에 두지도 못 하였기에 여자들의 사루마다 중앙은 항산 누렇게 변하여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엄마의 잠자리 모습은 나로 하여금 엄마가 나의 욕정은 물론 성에 대한 지식을 향상 시켜 줄 최고의 교과서나 다름이 없었다.

엄마의 헐렁한 몸빼 위에 손을 대고 보지둔덕을 주무르기도 하였고 여름이면 더위 때문에 몸빼도 입지 않고 사루마다차림으로 자고 있으면 엄마의 보지구멍이 있을 곳에 좆을 대고 문지르는 것은 예사였다.

그러던 중에 사고가 발생을 하고 말았다.

그날은 마침 장날이라 엄마가 형수하고 장에 다녀왔고 다녀온 엄마에게서는 술 냄새가 풍겼으며 엄마는 술에 취하여 쓰러져 마루에서 잠이 들었다

거기다가 무슨 일이었던지 지금으로서는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형수가 친정에 가서 집을 비운 상태였다.

말 그대로 노 마크 찬스였다.

내가 엄마를 끌고 안방으로 가는 동안에도 엄마는 몸을 가누지 못 하였고 헛소리만 하며 손을 허공에 데고 가르기만 하였다.

엄마를 방안으로 옮기고 나자 땀이 비 오듯이 나있었다.

우물 가로 가서 세수를 하고 안방으로 갔다.

엄마의 치마는 꼭 미친년이 옷을 입고 다니는 행색이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디서 뒹굴었는지 흙 범벅이고 또 어디서 뒹굴었는지 마치 빨고는 덜 마른 옷을 입고 나간 거처럼 초라하기 이를 때가 없었다.

일단 치마부터 벗겼다.

몇 칠을 입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사루마다의 중앙은 이미 누렇게 변한 상태였고 코를 가까이 대자 오바이트가 나오려고 하는 것을 겨우 참았다.

얇은 강목으로 된 사루마다 끝자락을 엄지와 검지를 쥐고 살며시 들어봤다.

검은 털들 틈으로 누가 언제 어떻게 찍었는지 모르지만 선명하게 도끼로 찍은 것 같은 금이 보이는가 싶더니 엄마가 잠꼬대를 하며 가랑이를 벌리자 거무튀튀한 보지 겉살 틈으로 빨간 속살이 나의 좆 더러 어서 박아 달라고 손짓을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바지와 팬티를 벗었다.

누렇게 바랜 엄마의 사루마다도 벗겼다.

한 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한 손으로 좆을 잡고 엄마의 보지둔덕에 대고 비비기 시작하였다.

나의 행동은 점점 대담하여 지기 시작하였다.

엄마의 조기 금을 벌리고 좆 대가리 부분을 가볍게 넣고 따스한 엄마의 체취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음~”엄마가 순간 잠꼬대를 하는가 싶더니 엉덩이를 들어버렸다.

본의 아니게 나의 좆은 엄마의 보지구멍에 완전하게 박히고 말았다.

“아제 누가 보면 어쩌려고”엄마가 나의 가슴을 밀치며 말하였다.

“!”순간 나는 이미 사촌아제가 엄마와 빠구리를 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안 이상 더 지체 할 필요를 느끼지 못 하였다.

서툴지만 나의 펌프질이 시작이 된 것이다.

“여.....영춘아 이게 무슨 짓이니?”엄마가 눈을 떴고 그리고 나의 가슴을 밀치며 말하였다.

“흥 사촌아제는 되고 난 안 된단 말이야?”하고 말하며 펌프질을 하자

“..................”엄마는 나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 하고 외면을 하였다.

난 엄마에게 다시는 사촌아제하고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고 대신 언제든지 하고 싶으면 나와 하자고 하였고 엄마는 자신의 비리가 발각이 된 것을 알고는 순순히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고 그날부터 나와 엄마는 형수의 눈을 피하여 즐기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다시 형수에게 문제가 생겼다.

나의 절친한 고추친구인 병석이란 놈이 형수에 대하여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24살의 청상과부답게 형수는 처녀에 가까운 탱글탱글한 엉덩이의 소유자이지만 너무 작고 아담하고 통통한 스타일이라 큰 주머니가 있다면 넣고 다니고 싶을 그런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친구 병석이란 놈이 형수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엄마하고 빠구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었다.

엄마를 사촌아제로부터 지키는데 성공을 한 나의 입장에서 형수도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친구 병석이라는 놈과 산에서 나무를 하고 내려오는데 형수가 콩밭에서 밭을 매고 있는데 놈이 두 손으로 형수님의 탱글탱글한 볼기짝을 만들더니 다시 두 손으로 어루만지는 시늉을 하는가 싶더니 지게를 내려놓고는 형수가 앉아 밭을 매는 방향으로 좆을 끄집어내어서 오줌을 갈기면서 용두질 치는 시늉을 하는데 형수가 뒤돌아 앉아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형수가 병석이 놈이 오줌을 누는 모습을 보아버렸다면 내가 병석이에 비하여 체력은 딸리는 편이지만 아무리 체력이 달린다고 하더라도 죽기 살기로 싸움을 벌이고 말았을 것이다.

친구 병석이 놈의 그런 행동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체력적으로 딸린 것은 놈이 잘 알았기에 놈은 내 앞에서 노골적으로 형수하고 한 번 할 계획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예사였다.

거기다가 놈은 이웃 마을에 사는 처녀들을 한두 명 작살을 낸 전력을 가진 소유자였기에 나로서는 형수를 지켜야 한다는 조바심을 억제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집에 나의 물받이가 되어버린 엄마가 있었기에 형수를 내 것으로 만들어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기화가 생겨 한 번 만 형수와 잠자리를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서로 미빌 신호를 전하여 하고 싶다는 표시만 하고 어디로 나오라는 신호만 준다면 형수도 내 말을 잘 따르겠지만 그 한 번의 기회가 도무지 생기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하늘은 돕는 자만을 돕는다고 했다던가.

엄마의 친정 즉 나로서는 외갓집의 먼 친척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우리 엄마에게 전달이 된 것이다.

외갓집 식구들로 가까운 사이라면 나는 물론이고 형수도 가서 도와야 하겠지만 나와는 안면도 없었던 외갓집 친척이었기에 나나 형수가 엄마와 같이 갈 필요가 없었기에 집에는 형수와 나만이 남았다.

나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난 엄마가 외갓집 친척 집으로 가자마자 비를 맞아가며 자전거를 타고 주전자를 들고 면 소재지로 가서 소주를 두 병 샀고 그리고 막걸리를 두 대 샀다.

그리고 막걸리를 조금 마시고 거기에다가 소주를 탔다.

형님이 월남전에 참전을 하여 전사를 한 후부터 형수는 마시지도 못 하던 술 그도 막걸리는 아주 잘 먹었다.

대신 소주는 입에 대지도 못 하였다.

너무 독하다는 것이었다.

“형수 좋은 게 좋다고 한 번 하자고요”형수님 방 앞에서 난 병석이 놈의 목소리를 들었다.

놈이 내가 없는 틈을 타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켁 켁 켁”난 막걸리 주전자를 내 방 앞에 있는 광에 숨기고 형수 방 앞으로 가서 기침을 하며 인적이 있다는 것을 놈에게 알렸다.

“영춘아 엄마 따라 안 갔니?”나의 인기척에 놀란 놈이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물었다.

“야~너 우리 형수님 방에서 뭐 했니?”따지듯이 묻자

“아니 너네 형 이야기 조금 했어, 형수 쉬어요.”하고 놈이 신발을 신고는 걸음아 나 살려라 는 듯이 줄행랑을 쳤다.

“형수 병석이가 수작을 부렸죠?”형수를 보고 묻자

“도련님 병석이 도련님 때문에 미치겠어요.”하고 형수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형수 비도 오고 출출 한 것 같아서 막걸리 받아왔는데 어제 파 뽑아 다듬던데 아직 있죠? 파전 한 장만 부탁하면 안 되겠어요?”하고 말하자

“호호호 도련님하고 단 둘이 막걸리라 구미가 돋는데요.”하고 방에서 나오더니 형수 방과 붙어 있는 부엌으로 들어갔고 난 광으로 가서 소주를 탄 막걸리가 든 주전자를 꺼내서 부엌으로 갔다.

"도련님 여기서 드시게요?“형수가 파전을 굽기 위하여 반죽을 솥뚜껑을 뒤집어 화덕에 얹어 놓은 그 위에 퍼서 넓게 만들며 묻기에

“아무대면 어때요”하고 말하였다.

사실 내가 형수를 덮치더라도 가장 안전 할 것으로 생각을 한 곳이 부엌이었다.

요즘의 부엌은 가스를 주 연료로 사용을 하지만 당시의 시골 그도 두메산골에서의 연료는 나무가 전부였고 그도 새마을 사업에 녹화 사업이라는 미명 하에 벌목도 단속을 하던 때라 최고의 연료는 부러트려져 떨어진 소나무의 솔가지와 나뭇잎이 거의 전부였고 그 솔가지 더미와 나뭇잎은 똥을 누고 짚불로 뒤처리를 하던 당시로서는 물침대나 다름이 없었으며 간 큰 병석이 같은 놈이나 안주인 허락 없이 들어 갈수가 없는 공간이기에 난 그 이상의 좋은 장소가 없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이었다.

“도련님 어머님 아시면 제가 도련님 고추 떨어지게 하였고 한다고 하실 거예요”형수가 눈을 흘기며 말하였다.

“!”손간 돌대가리라고 놀림을 받던 나의 머리에서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뭔가가 생각이 났다.

“헤헤헤 그게 떨어지면 형수님이 주워서 형님 것 대신에 사용을 하시려고요?”지금 생각하여도 너무나 뛰어난 순발력이었다.

“어머머 도련님 못 하시는 말이 없어요.”형수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흘겼고

“그럼 안방에 상을 펴요?”형수님에게 준 무안함을 만회하기 위하여 작은 상에 막걸리 주전자와 젓가락을 얹으며 묻자

“그래요, 도련님”하고 대답을 하면서도 형수는 얼굴을 들지 못 하였고 앉은뱅이 상에 젓가락과 술 사발을 놓으면서 계속 훔쳐 본 형수의 얼굴은 여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기거하는 안방에다(엄마하고 첫 관계를 한 후부터 내가 하고 싶어서 엄마를 부른다든지 또 엄마가 먼저 하고 싶어 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엄마하고 관계는 엄마의 신음소리 때문에 내 방아서만 함)상을 놓고 기다리던 나는 형수의 붉게 물든 볼과 탱글탱글한 볼기짝 그리고 엄마의 보지에 박혔던 때를 생각하며 참다 못 해 엄마의 빨아 둔 사루마다로 좆을 잡고 딸딸이를 쳤고 치고 나서 막 엄마의 사루마다를 개어 놓았던 상태로 만들어 놓는 순간 안방 문이 열리면서 파전 두세 개가 놓인 접시와 파를 잘게 썰고 고춧가루에 식초를 섞은 시큼한 간장 종지를 들고 들어왔고 식초의 시큼한 냄새 때문에 비릿하고 고약한 좆 물 냄새를 눈치를 차리지 못 한 형수는 여전히 불게 물든 얼굴을 하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형수 한 잔 받아요.”막걸리와 소주가 짬뽕이 된 큼직한 주전자에 젓가락을 넣고 휘휘 저은 후 들고 권하자

“예 도련님”하고 형수가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었고 난 형수의 술잔에 막걸리와 소주가 짬뽕이 된 막걸리를 잔이 넘칠 정도로 가득 부었고

“도련님 막걸리가 아주 독해요”넘치려고 하는 술잔에 입을 대고 넘치지 않도록 조금 마시더니 미간 찌푸리며 말하기에

“그래요? 도가(양조장을 예전에는 도가라고 했음)아저씨가 너무 많이 마셔 물을 덜 섞었나 보군요! 후후후 그럼 재수가 아닌가요?”하고 너스레를 떨자

“호호호 그건 그래요”하고 웃으면서 나의 잔에도 막걸리를 가득 채워주었다.

막걸리에 소주를 탄 술의 효과는 아주 빠르게 나타났다.

“도련님 병석이 도련님 집에 오지 말라고 하세요. 심심하면 찝쩍거려요”형수 입에서 기대하지 않은 말이 나오기 시작을 한 것이다.

“왜 병석이가 형수님을 찝쩍거리지 형수가 미인이라서 그런가? 형수 냄새가 나지 않은 꽃에는 나비가 날라들지 안잖아요?”시치미를 때고 되묻자

“도련님 눈에도 제가 그렇게 보여요?”형수가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하고 대답하자

“그럼 도련님은 왜 안 그러세요?”형수가 웃으며 물었고 그런 형수의 얼굴은 소주를 탄 막걸리 탓도 있었겠지만 더욱더 심하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형수 그걸 말이라고 물어요? 형수는 제 형수잖아요”하고 말하면서 잔을 들고 마른 입안을 막걸리로 적시면서도 형수의 얼굴에서 시선을 때지 않았다.

“그건 맞아요. 하지만 형님은.......”하고 형수가 말을 흐리자

“형수님 아직 형님이 생각이 나세요?”슬며시 형수 옆으로 다가가서 형수의 손목을 잡으며 묻자

“병석이 도련님이 찝쩍거리면......”하고 말을 흐리기에

“사실 저도 형수님을 좋아해요”술상을 옆으로 물리고 형수를 끌어안으려 하며 말하자

“아~도련님”하고는 형수는 되레 나를 먼저 내 목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스스로 내 목을 끌어안고 누우며 눈을 지그시 감았고 난 하늘이 준 천재일우의 기화라고 생각하고 형수 입에 내입을 포개자 형수는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였다는 듯이 내 입안으로 자신의 혀를 들이 밀었고 난 형수의 옷고름을 풀어 제키고 임자 없는 형수의 젖가슴을 마구 주무르기 시작하였다.

“아~우리 이러면 안 되는데.........”긴 키스를 끝내고 형수의 월남치마를 잡고 풀어 내리려 하자 형수가 단추를 잡으며 말하였으나 잡은 손의 힘은 거의 형식에 가까울 정도로 힘이 없었기에 손쉽게 형수의 치마를 벗겼고 그러자 형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혁대를 풀었고 바지와 빤스를(팬티를 당시에는 그렇게 불렀음)한꺼번에 내리더니 마치 좆을 처음 본 여자처럼 신기하다는 듯이 보았고 난 그런 형수를 다시 눕히고 형수의 빤스를 벗기고 몸을 포개었다.

“도련님 어머니하고 하면서도 그렇게 딱딱해 져요”좆을 형수의 보지구멍에 박으려고 보지구멍 입구에 대는 순간 형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어.....어떻게 알았어요?”놀란 나머지 형수 보지구멍에 좆을 박으며 토끼눈을 하고 묻자

“윽~아~귀신은 속여도 저는 못 속여요, 어머니하고 저하고 같아요?”형수가 신음을 하며 나에게 물었다.

“형수 그걸 말이라고 물어요? 엄마 보지는 쭈굴 보지고 형수 보지는 탱글 보진데”하고 말하며 펌프질을 시작 하자

“호호호 쭈굴 보지? 탱글 보지? 말이 되는데요. 천천히 하세요. 어머니 오늘 안 오시잖아요?”하고 말하면서 형수는 능숙하게 엉덩이를 돌려주었다.

그날 이후로 형수와 나 사이에는 남들이 알아듣지도 못 하는 은어가 하나 생겼다.

물론 처음에는 엄마하고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던 형수가 나와 관계를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은어였다.

<도련님 탱글이 못 봤어요?>하고 시작이 된 탱글이란 단어가 그 은어였다.

그 말은 형수가 나와 엄마사이에서 질투를 느끼고 시어머니인 엄마 몸에서 남자의 정액 냄새가 배어나오면(요즘이야 집집마다 샤워 시설이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없었고 간단하게 씻으려고 하여도 부엌이나 광 같은 곳에 숨어서 씻었기에 관계를 하고 나면 숨어서 뒷물이나 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아무리 씻어도 냄새가 났음)시어머니인 엄마 모르게 윙크를 날리며 말하였고 그리고 손가락으로 형수가 마음 놓고 신음을 하게끔 할 만한 은밀하게 장소를 말하면 뒷산이나 개울가 아니면 우리 둘 만이 아는 은밀한 곳으로 가서 수시로 서로를 탐닉하였다.

그렇게 형수와 관계를 하고는 난 엄마와 형수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둘 사이에서 즐겼다.

그리고 내가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게 되자 형수는 몇 날 몇 칠을 울면서 아쉬워하였고 그런 형수가 너무나도 좋아 결혼을 하고도 심심하면 관계를 가졌고 결혼 얼마 후 처갓집의 도움과 우리가 소유하고 있던 전답의 절반을 팔아서 보태어 지금 살고 있는 도시로 우리 부부가 나오자마자 형수는 하나뿐인 아들의 교육을 위하여서라는 핑계로 나머지 전답과 집까지 팔아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로 아니 정확하게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왔고 내가 이사를 한 후로 우리와 함께 도시로 나온 엄마하고 나의 진정한 물받이가 되어버린 마누라만을 상대로 즐기다가 형수가 이사를 온 후로는 엄마 마누라 그리고 형수를 상대로 즐겼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고픈 재미가 있는 이야기를 마누라가 알면 질겁하고 나자빠지겠지만 나이 예순이 넘었고 몇 해 전 전립선에 염증이 생겨 치료를 받아 낳았다고는 하지만 그때의 염증으로 발기부전이 된 나의 입장에서 비아그라나 씨알리스 등의 발기를 돕는 약물을 바르거나 소위 칙칙이라고 하는 것일 뿌려야 하지만 일흔을 바라보는 형수만 보면 생각이 나서 형수 귀에 입을 대고 나직하게 <탱글이 어디 있을까? 찾아 봐야겠지?>라고 말을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흘겨보지만 물이 거의 나오지를 않아 따가워하면서도 형수는 그녀 본연의 질투심에 지금도 가랑이를 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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