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연풍 (단편)

지하철 연풍 (단편)

시베리아 0 354

매년 입시 철이 오면 생각 나는 일. 처음엔 참으로 당황스럽고 후회되어서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였던 일이 생각난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란 묘한 것이어서 언제나 쓰러진 그 자리에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법.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고, 호소할 수 없는 일이어서 울기도 많이 했었고, 뜬눈으로 지샌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독약을 앞에 놓고 망설이기도 했고, 유 서는 몇 번이나 썼다가 찢어 버렸다. 운명이 나 자신에게만 너무나 가혹한 것 같았 고, 세상 모든 것이 나를 외면한다고 생각하였다. 매사에 겉으로는 강하다는 평을 받으면서도, 스스로에게는 너무나 약해서 무너져 버린 내 양심과 도덕심은 그 시절 나를 혹독하게 고문하였다. 지금은 편안한 마음 으로 말 할 수 있지만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 일 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또 달라진 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한다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일에 대 한 지나간 감상일 뿐이다. 뉘우치거나 후회해 본들 누구도 나를 도와 줄 수 없고, 동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동정은커녕 나를 욕하고 손가락질 할 것이 분명한 일일 것이다. 지금으로 부터 꼭 사 년 전일이다. 외아들 성철이가 대학 입시를 치루기 위해 면접 고사장으로 가던 날. 남편은 성철이가 중 2 때 교통사고로 죽었다. 한창 사업을 일으켜서 밤낮 없이 뛰던 남편은 과로가 겹쳐서 지방 출장을 갔다 오다가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내고 명 을 달리 하였다. 너무나 충격이었다. 그때 내 나이, 서른 여섯. 남편과는 한 직장을 다니다가 연애 를 하여서 결혼을 하였다. 남편은 내게 부족함이 없는 남자였다. 연애 시절부터 나 를 공주처럼 떠받들었다. 한없이 정이 많고, 마음씨가 따뜻한 남자였다. 스물 두 살 의 나이에 남편의 사랑에 감복하여 결혼을 하고 속도 위반으로 임신한 아들 성철이 를 낳았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더 없이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이었다. 남편은 키가 크고 인물이 호남형이었고, 매너가 너무 좋은 남자였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나 하나만을 사랑했다. 나도 남편의 그런 사랑에 맞추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해 주었다. 섹스도 그가 원하는 체위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다 해 주었다. 남편은 내가 그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해주면 아기같이 웃으며 좋아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은 섹스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를 때, 이미 나는 오르가즘을 알 았다. 내가 오르가즘에 도달할 때까지 남편은 정성으로 나를 애무하고 기다려 주었 다. 나도 밖에 나가면 미모로는 빠지지 않는 다는 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이 함께 외출하면 탈렌트 부부인 줄 아는 사람이 많았다. 새삼 그런 칭찬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 시절엔 그것이 서로를 아껴주는 끈이었다. 그런 남편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 인생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그런 슬픔이었다. 나도 같이 따라서 죽어야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들 성철이를 보면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성철이는 남편의 복사판이라 할만큼 남편과 닮아 있었다. 단지 남편에게는 없는 쌍꺼풀이 있었다. 그래서 간혹 남편보고 성철이와 남편을 구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쌍꺼풀 남편과, 비쌍꺼풀 남편"이라고 놀린 적도 있었다. 남편은 그 시기에 다니던 건설회사를 그만두고 혼자서 독립회사를 차렸다. 열심 이 몸으로 뛰는 부지런함 덕에 남편의 회사는 그 흔한 부도 한 번 없이 착실하게 발전을 하였다. 따라서 형편도 조금씩 나아져서 집도 큰 것으로 늘렸다. 그러나 남 편은 적은 식구에 너무 큰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서른 여섯 평짜리 아파 트에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행복하였다.



 



행복과 웃음이 아파 트가 비좁도록 가득한 느낌이었다. 그런 시간에 남편이 죽었으니 나의 슬픔은 말 할 수가 없었다. 겨우 나이 서른 여섯에 과부가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한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슬펐다. 그러나 아들 성철이를 보아서라도 그렇게 있을 수 없었다. 남편을 닮은 또 하나의 남편을 위해서라도 나는 일어서야 하였다. 그래서 마음을 정리하고 남편 회사를 맡았다. 남편도 형제가 없는 편이라서 겨우 한 분 계시는 시누이 남편 이 그 동안 회사를 보아주었지만 남편만 하지는 못하였다. 나는 남편과 같은 직장 에 다니던 기억으로 장부를 정리하고 거래선을 찾아 다녔다. 처음엔 거친 건설 현 장에 여자의 몸으로 버티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살기 위해 버텼 다. 다행히 남편은 건실한 회사 경영을 하여서 어렵지 않게 유지할 수 있었다. 처음 엔 여자고, 과부라는 호기심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도 받았지만, 묵묵 히 참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대로 사람들을 경영하는 비법을 터득했다.



 



남자처 럼 작업복을 입고 거친 남자에게는 거칠게 부딪쳤고, 여자의 장점을 이용할 수 있 는 곳은 여자로서의 장점을 이용했다. 그러나 남편이 너무나 내게 있어서는 큰 자 리였기에 웬만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상 어디에도 죽은 남편 만한 남자는 없었다. 그저 알량한 돈 몇 푼으로 여자의 환심이나 사려는 한심한 남자들 뿐이었다. 그래서 난 내 몸을 지킬 수 있었다. 내 몸을 지키는 것이 남편에 대한 도리이고, 성철이에 대해 부끄럽지 않을 것이 라는 것을 알았다. 주위에서 재혼을 거론했지만 한 마디로 잘라 버렸다. 남편 외에 는 그 누구에게도 정을 줄 수 없었다. 사는 것이 급박해서 그랬던지, 아니면 남편이 내게 남기고 간 사랑이 너무 깊어서 그랬던지, 또 나이가 그랬던지, 남자에 대한 안 타까움은 없었다. 정신없이 사업에 몰두하는 것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어서 차라 리 좋았다. 그래서 더 일을 열심히 하였다.



 



사업은 점점 회복하여 남편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발전을 하였다. 자그마한 건물도 두어 채 사서 재산을 늘리고 성철이를 뒷 바라지 하였다. 성철이도 아버지가 돌아간 충격을 잊고 학업에 열중을 하였다. 집에서 나와 같이 있으면 명랑하게 나를 위로해 줄줄 하는 철이 들었다. 하지만 밖엔 나가서는 입이 무겁고 행동이 침착한 사내 아이였다. 그리고 공부도 잘 하여서 언제나 전교의 일 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자랑스런 아들이었다. 그것이 나의 삶의 의미였고 보람이었 다. 일하면서도 신이 났고, 남편의 죽음을 잊을 수 있었다. 남편은 비록 일찍 갔지 만 나에게 다른 선물을 남겨 주고 간 셈이었다. 그래서 더욱 다른 남자를 거들떠 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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